스물에 만나 마흔이 넘은 인연

1996년 대한민국 서울 종로는 나에게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인터넷 이전에 나우누리와 하이텔같은 모뎀 통신을 하던 그 시대는 작은 모니터 속 세상처럼 미래를 알 수 없던 깜깜한 19살 대학교 1학년 늘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던 시절.

대학교 2학년 휴학을 하고 종로 ESL에서 하루 6시간씩 하는 Intensive Course를 들으면서 대학생활 대신 영어에 내 전부를 올인하고 만난 친구.

스물살에 만난 우리는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미국과 캐나다 서부지역 이웃으로 만나게 되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어냈다.

지나온 20년 세월은 스무살 아가씨를 엄마로 만들었고 이제는 같은 부모의 마음,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하는 이방인의 마음으로 친구에서 가족같은 동지애가 느껴지는 마흔 넘은 아줌마가 되었으니 2박 3일 친구의 방문은 서로에게 힐링이 되는 추억여행, 네버엔딩 수다!

Cultus Lake 해변과 호수 경계에 걸쳐져 있는 쓰러진 고목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엄마로서 버티고 있는 이 삶의 무게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를 버리고 자식을 온전한 성숙된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활용해야하는 나무의 일생과 같으니 방파제 처럼 모든것을 막아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은 늘 끊임없는 무한도전의 연속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산처럼 쌓인 5명 빨래를 세탁기 돌리면서 20년 전 나를 위해 나무가 되어 주신 엄마 아빠도 생각나고 이제 내 가족을 위해 빨래를 하고 있는 내 삶이 돌고 도는 우리네 인생과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난다.

7월 첫째주! 미국과 캐나다의 황금연휴가 끝나고 세남매와 함께 하는 여름방학이 또다시 3주간 여름방학 캠프가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엄마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시작된다.

휴가끝! 직진 시작!!

 

캐나다 데이

매년 7월 1일은 캐나다 데이라서 동네마다 퍼레이드와 다양한 행사로 캐나다에서 사는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2013년 7월에 캐나다로 이주를 한 우리 가족도 다음해부터 캐나다 데이 행사에 참여했는데 2014년 7월은 얼마나 뜨거웠는지 날씨도 뜨겁고 처음 참여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City Girl 이었던 한국인 엄마의 캐나다 데이를 맞이하는 의지는 더 뜨거웠다.

2015년 8월 엘더그로브에 정착한 후 부터는 조용한 시골동네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북적거리는 도시 행사 대신 Old style의 시골동네 퍼레이드와 스포츠 데이에 참여하는 것으로 캐나다 데이를 보내고 있다.

올해가 건국 151주년인데 가장 화려한 캐나다 데이 벤쿠버 퍼레이드는 재정악화로 취소가 될 정도로 캐나다 경제는 매우 불안정한 요즘!

오히려 다운타운 벤쿠버와 정반대로 캐나다의 작은 소규모 도시들은 캐나다 데이 퍼레이드가 점점 확장되고 발전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캐나다로 유학 또는 이민을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종 인프라가 몰려있는 벤쿠버에 집중되다 보니 관련 사업들이 활성화 되는 장점과 더불어 저절로 렌트비 상승은 물론 과밀화 현상이 속출해서 도시의 답답함을 벗어나려고 좀 떨어진 지역까지 찾아오다보니 현재 칠리왁 지역까지 한국인의 숫자가 매우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엘더그로브에서 2009년부터 정착해서 살기시작한 동네친구 스테파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하우스의 구매비용은 한화로 3억이 안되었다고 하는데 2018년 현재 스테파니의 집값이 7억 이상 정도라고 보면 우리가 너무 늦게 캐나다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약 10년이라는 세월을 그나마 한국에서 보내고 두 아들을 한국에서 출산하여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두 아들의 History를 만들어 준것에 대해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일이라고 한국인 엄마는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캐나다는 모자이크 문화라고 부르면서 이민자들의 문화가 그대로 함께 섞여서 또 하나의 캐나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강조하다보니 다문화가 오히려 당연한 또는 자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의 또다른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는 뉴펀들랜드+한국 반반 가족의 독특함이 세남매에게는 항상 고마운 그들의 역사가 되기를 한국인 엄마는 바란다.

쫄면의 추억

2013년 캐나다로 이주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대부분 외식을 자주해서 요리도 제대로 못하는 아내였던 내가 캐나다에 살면서 무조건 삼시세끼 만들어 먹어야하니 유튜브를 요리선생님 삼아 이제 제법 요리 어느정도 하는 아내로 캐네디언 남편이 인정해주는 정도가 되었다.

2005년 한국에 영어강사로 처음 근무할 당시, 영어학원 근처 김밥천국에서 삼시세끼를 해결하던 젊은 캐네디언 남편은 매일 김밥 한줄 먹으며 돈을 모아 캐나다 현지 학자금 대출을 갚고, 대출의 늪에서 벗어나자마자 조금씩 김밥천국의 다양한 메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날 처음으로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어떻게 먹는지 몰라서 밥위에 올려진 야채들을 젓가락으로 반찬처럼 집어먹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찬 김밥천국 아주머니가 비빔밥의 먹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일화는 캐네디언 남편이 한국 음식을 먹을때 마다 자주 등장하는 추억담 중 하나이다.

여름이면 별미로 만들어주는 쫄면을 먹을때면, 쫄면 위에 반만 잘라서 나오는 삶은 계란이 아까워서 그 반 나오는 삶은 계란을 다시 반으로 잘라서 중간에 한번 먹고 마지막으로 남은 삶은 계란을 먹었는데 그 계란을 다 먹고 나면 얼마나 서운했는지 눈물젖은 반쪽 삶은 계란 이야기 때문에 쫄면을 만들때 미리 계란을 넉넉하게 삶아서 남편에게 준다.

누가 들으면 이게 무슨 전쟁 시절 이야기냐 보릿고개 이야기냐 하겠지만 그렇게 캐네디언 남편의 한국 생활 첫해는 모든것이 낯설고 무조건 돈을 아껴서 학자금 대출금을 갚아야 했던 평범한 흙수저의 삶이었던 것이다.

2005년 당시 캐네디언 남편이 일년동안 김밥천국 김밥 한줄로 끼니를 해결하고 고생한 덕분에 2006년부터는 한결 여유롭게 연애를 시작하고 점점 살림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2009년 결혼할 당시부터 한국을 떠나기 전 2013년까지 너무 잦은 외식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악의 지출경비 실수였던 것 같다.

캐나다로 이주한 2013년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삼시세끼를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그동안 한국에서 얼마나 음식지출비용이 컸는지 외식하는 습관을 바꾸는데 꼬박 3년이상 걸린것 같다.

삼남매와 함께 5인가족이 되고 보니 1회 외식비용이 보통 레스토랑에서는 백불정도가 나오는데, 맥도널드에서는 30불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맥도널드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나면 바로 화장실에 가야하는 경우가 많아서 요즘음 최대한 집에서 집밥을 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생각나는 쫄면의 추억 때문에 자여스럽게 쫄면을 만들고, 남편과 함께 쫄면을 먹다보면 또다시 상기되는 2005년 우리 젊은날의 한국 김밥천국 추억 이야기는 지금 삼남매는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한국인 엄마와 캐네디언 아빠만의 한국에서의 사랑이야기 같다.

 

Cascade Falls Regional Park

캐나다 BC 미션 지역에 위치한 Cascade Falls Regional Park

오직 폭포를 보기위해 엘더그로브에서 미션으로 달려가는 길에 보이는 대저택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은 자연스럽게 드넓은 들판에 한가롭게 풀 뜯고 있는 소나 말이 부러워질 만큼 빈부격차의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잠시 가는 길에 호사스러운 대저택들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으니 간단하게 간식을 쇼핑하고 맥도널드 아이스커피로 기분전환을 하면서 마지막 산길을 운전해간다.

초행길의 경우 무조건 내가 남편의 인간 네비게이션 역할을 해야하는데 최종 목적지를 진입하기 전 나오는 주유소부터는 캐나다 산길에 아무것도 없고 오직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순간 잡생각이 사라지고 목적지 표지만을 집중적으로 찾게되는 목적의식이 생긴다.

드디어 찾아온 미션 폭포 Cascade Falls Regional Park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그 흔한 관광 안내소가 없으니 입구에 설치된 지도를 살펴본다.

폭포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기 때문에 폭포 소리에 홀린듯 폭포를 보기위해 세남매를 이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폭포를 따라 철조망이 쳐져 있고 나무 계단이 있어서 생각보다 편하게 폭포 전망대까지 올라 갈 수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스펙타클 하지는 않지만 선녀와 나무꾼의 배경같은 폭포가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얼마나 그 소리가 우렁차게 떨어지는 지 말이 필요없이 그저 폭포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 세남매가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나는 보기만 해도 무서운데 세남매는 그 철렁거리는 다리를 달려간다. 엄마가 무섭다고 해도 둘째 아들은 농담하지 말라고 하니 정말 겁없는 녀석들!

폭포 자체만으로도 너무 아름답고 산속 분위기 자체가 너무 신비스러운데 여전히 도시엄마는 캐나다 산속이 참 편하지 않으니 짧은 산행이 그저 다행이다 라고만 생각했다.

주차장 옆으로 피크닉 지역이 있는데 한국산처럼 계곡으로 내려 갈 수 있어서 세남매와 함께 계곡으로 내려가 보았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가 폭포 물줄기가 굵고 빠르게 내려와서 물고기도 보이지 않고 깨끗한 폭포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 서늘한 공기가 추웠다.

남편과 세남매는 신이나서 바위에도 올라가고 돌멩이도 줍고 더 오래 있고 싶어했는데 가장 아쉽게도 화장실 시설이 깨끗하지 못해서 점심 시간도 되었고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이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깨끗한 화장실 시설을 갖추고 있느냐가 기준이라서 미션 Cascade Falls Regional Park는 오래 머물고 싶은 공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많을 때 마음을 비우러 와서 시원한 폭포소리에 가볍게 힐링하고 가기에 좋은 공원이다.

 

 

 

캐나다 공동육아의 방식

한국에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두 아들 키울 때는 친정부모님의 도움, 어린이집의 도움으로 너무 쉽게 키웠었는데 캐나다에서 처음 독박육아를 시작하면서 막내딸을 임신하고 있었고 캐네디언 남편도 BC 출신이 아니라서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부부의 생활은 이민 초기 3개월은 매일 울고 싸우고 버티는 3중고의 시절이 있었다.

타향살이의 가장 큰 어려움은 부부와 세남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정착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인 이민자들과 똑같은 시작점이었지만, 아무리 영어를 하는 캐네디언이라도 가족의 울타리가 없는 타지역 사람이라는 점은 마이너리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의 기준은 간단하게 BC 출신으로 가족들이 거주하는 환경을 가진 남편은 메이저리그, 동부출신으로 비빌 언덕이 없는 남편을 마이너리그라고 나누기 시작했다.

캐나다 동부 끝 뉴펀들랜드 섬 출신 마이너리그인 남편을 따라 동부로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던 이민초기.

동부 뉴펀들랜드 시댁 식구들이 서부로 우리 가족을 만나러 오면 얼마나 아이들이 좋아했는지 외롭고 힘들기만한 타향살이 마이너리그를 벗어나고 싶어 동부 고향으로 가자고 늘 방법을 찾던 우리에게 아주 단호하게 동부 시댁 사람들은 척박하고 경제상황이 좋지 않으니 뉴펀들랜드 고향으로 절대 오면 안된다고 말렸다.

그렇게 고향에 대한 마음을 접고 정착한 시골마을 엘더그로브에서 2016년 처음으로 공동육아라는 캐나다식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엘더그로브 시골마을에서 공식적으로 아이들과 엄마들의 친구관계가 형성되는 곳은 스트롱스타트, 패밀리플레이스, 리틀페더스 같은 무료프로그램이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그리고 유치원 입학전까지 그들의 공동육아를 통한 인적 네트워크가 시골마을에서 나와 같은 마이너리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한국식의 양육방법을 캐나다식 양육방법으로  바꾸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지난 3년동안 캐네디언 엄마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는지 외국인의 눈으로 늘 지켜보고 물어보고 직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특히 스트롱스타트에서 매일 만나는 선생님에게 직접적으로 내 상황을 오픈하고 가장 솔직하게 나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작은 시골동네이기 때문에 육아에 필요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도 바로 동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무료유아교육 프로그램이었다.

2013년생 막내딸은 2016년부터 엘더그로브 정착하고 곧바로 스트롱스타트, 패밀리플레이스, 리틀페더스 3곳을 동시에 참여해서 세남매 중 가장 성공적으로 독박육아를 공동육아로 바꾼 최대수혜자이다.

덕분에 매주 플레이데이트를 하고 매일 많은 동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 된 전형적인 캐네디언의 문화를 즐기는 가족 중 유일한 메이저리그가 되었다.

한국 옛말에 개천에서 용난다더니 이방인 마이너리그 엄마 아빠 사이에서 메이저리그 막내딸이 나온건 2013년 이후 4년 이민생활 중 가장 큰 성공이다.

외롭고 힘든 타향살이에서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동네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내 자식 또래의 친구들에게 먼저 잘해주면 저절로 동네 아줌마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떠나 같이 독박육아를 하는 같은 엄마라는 공통적인 주제로 내 진심을 알아주는 동네 친구 하나만 있어도 보수적이고 무료한 캐나다 삶에서 나를 지켜줄 든든한 동아줄이 생길 수 있다.

 

 

캐나다에서 중고차의 의미

주말이면 무조건 오전 야외 활동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세남매 데리고 달려가는 중간에 둘째 아들이 오바이트를 해서 모든 일정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계획과 달리 집에서 있다보니 남편은 자동차를 청소하고 엄마는 앞마당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마당에 핀 잡초를 뽑다가 잡초도 이렇게 이쁜 꽃이 피는구나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둘째 아들은 오바이트를 하고 나서 기운을 차렸는지 막내딸과 함께 아빠가 청소하는 벤에서 놀기 시작했다.

2013년 한국을 떠날때 일년도 안된 새차를 팔고 왔지만 그때는 그 차가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없었는데, 2013년에 중고로 구매한 벤은 우리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서 같이 동고동락한 사이라 그런지 늙고 병들었지만 버리고 싶지 않아서 월요일 최종적으로 진단을 받기위해 정비소 예약을 한 상태이다.

뼈대를 드러낸 늙은 벤의 내부는 생각보다 편안해서 세남매가 나란히 누워보고 캠핑용 벤으로 가능하다면 끝까지 함께 가보자고 의견을 모아본다.

얼마전에 새로 벤을 사려고 남편이 나갔다가 아주 잘빠진 새 벤을 하루 데리고 온적이 있었는데 남편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새차를 사지 말고 중고를 사는것이 경제적이라는 말에 다시 구매취소를 한 적이 있었다.

캐네디언들이 얼마나 검소하고 차 하나를 바꾸는데도 신중하게 행동하는지 한국 아줌마가 보기엔 너무 신선한 문화충격이었다.

아무리 돈이 있는 사람들도 최신 신형차량을 구매하는 순간 그 차량의 인생은 중고차가 되어 하락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잘 정비된 중고차량을 구매하는 편이 가성비가 좋다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2008년형 벤을 2013년에 만불 주고 구매해서 2018년까지 타고 있으니 5년동안 잘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인데 겨우 10년 된 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남편의 책임이 크다.

세남매와 차없이도 잘 사는 시골 아줌마 입장에서는 출퇴근을 위한 남편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지만, 새차와 중고차에 대한 캐네디언의 생각은 또다른 인생공부를 하는 기회가 되었다.

새차를 사고 도난이 걱정되어 CCTV를 설치해야지 걱정하면서 보낸 하룻밤 보다는 오래된 벤을 다시한번 재정비하는 결정을 내린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따라가보자.

 

 

5월 마지막날 – 여름방학을 준비하는 자세

6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모두가 지쳐가는 5월도 오늘이 마지막 날!

캐나다 초등학교의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모두들 오직 여름방학만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날짜를 세어가기 시작한다.

7월에는 캐나다 공립학교에서 3주간 오전 무료 여름방학 캠프를 하기때문에 그나마 8월만 잘 버티면 여름방학은 무난하게 지나갈것 같다.

2016년 12월부터 시작했던 두 아들의 태권도 수업도 여름방학동안 잠시 쉬면서 매달 두아들 태권도 수업 비용으로 나가는 300달러를 좀더 값지게 사용하고 싶어서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오직 검은띠를 위해서 두 아들을 어르고 달래서 화요일&목요일 45분씩 투자했는데 얼마전 남편의 아이키도 세미나를 다녀온 후, 지난 3년간 쉼없이 두 아들에게 검은띠라는 엄마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작 두 아들의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한국식으로 엄마는 두 아들에게 직진만을 강요하고 삶의 여유를 느낄 시간을 누리지 못한것이 아닌가해서 6월, 7월, 8월은 가족 모두가 여유로운 여름방학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요즘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또는 제주도에서 한달살아보기가 유행이던데 편안한 삶을 박차고 나가는 그들의 도전정신에서 신선한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었다.

두아들의 태권도 수업은 잠시 먹추고, 인터넷도 3개월동안 끊고 유튜브와 인터넷이 없는 아날로그 방식의 여름방학을 세남매와 함께 하자고 한달동안 온가족이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태권도와 인터넷으로 나가는 매달 400달러의 시간과 돈이 여유가 생기면 그에 맞는 대체상품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남매와 함께 계속해서 고민을 해야겠지만 충분히 인터넷과 아이패드가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도해 볼 생각이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을 달리기 위해 직진이 아닌 쉼표 또는 유턴을 해봐야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인생공부를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부처님 오신 날

사형제 중 큰아들인 아빠와 칠남매 중 다섯째인 엄마는 올해 1월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결혼 반대로 힘들어하다가 할머니가 다니시는 절에 계신 큰 스님께서 허락을 해서 겨우 결혼을 하게 되었다.

23살 젊은 엄마는 부산에서 할머니와 세명의 시동생과 함께 시집살이를 시작했는데 당시 아빠는 일본으로 단기연수를 다녀오느라 엄마의 신혼생활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시어머니와 말도안되는 구박을 받으며 겨우 23살의 젊은 엄마는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고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나는 절대로 시어머니 없는 집, 둘째 아들에게 시집가야지 어릴때부터 다짐했었다.

명절이면 당시 6시간 이상 걸리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부산 할머니 집에 가면 제사만 지내고 다음날 곧바로 부산 큰이모집으로 외가친적들이 모두 모여서 오로지 그 재미로 명절이 기다려졌던 어린시절의 즐거운 기억은 모두 엄마 쪽 이모들의 특유의 단합으로대학을 입학하기 전까지 늘 외가친척들과의 여름휴가와 명절이 나의 모든 유년기 시절의 추억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엄마, 아빠가 사업을 하셔서 나는 마산 외할머니 댁과 부산 큰이모댁에서 생활했는데 지금 막내딸 나이인 다섯살 즈음이라 자세한 기억은 안나지만 외할머니의 거친 손과 늘 간지러운 내 등을 긁어주시던 손길 그리고 할머니에게 TV 프로그램 스케줄을 달달 외워주곤 했던 추억이 여전히 마흔이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면, 할머니는 큰며느리가 미웠기때문에 당연히 나와 내 동생도 늘 찬밥신세였고 일년에 딱 두번 만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은 하나도 없이 늘 할머니 때문에 싸웠던 엄마 아빠의 불화만 남아있다.

아마도 그런 시집살이에서 엄마를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는 아빠의 단 한가지 방법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직장을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 혼자 캐나다에서 세남매를 키워보니 엄마는 아마도 타향살이와 독박육아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고 두 아들출산하고 키울 때 그렇게 많이 도와주셨던 것 같다.

인생은 돌고 돌아 아무리 내가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피해 외국인 남편을 만났어도 엄마처럼 시집살이는 안하지만 아주 지독한 캐네디언 시어머니를 만났다는 팔자는 바꿀 수 없었다.

2013년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하고 막내딸 출산에 맞춰 동부 끝 뉴펀들랜드에서 서부로 날라오신 시어머니는 이주동안 계시면서 정확하게 두시부터 네시까지 두시간 당시 세살과 다섯살 두 아들을 데리고 맥도널드에서 점심 먹이고 오는 것이 전부셨다.

당시에 지하 셋방 살이를 할때였는데,우리집이 누추해서 그러신가보다 매우 서운했지만 이를 악물고 이사를 가려고 매일밤 동네 모든 부동산 사이트를 공부하며 2016년 드디어 작은 내 집으로 이사를 했다.

2016년 새로 집을 사서 시어머니 방까지 준비하고 시어머니가 이주간 두번째 방문을 하셨을 때는 세남매와 함께 생활 하기 싫다고 남동생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주말동안만 우리가족이 시어머니 계신 외삼촌 댁으로 건너가야지만 만날 수 있었다.

독박육아로 지친 내가 딱 한번 데이트 하겠다고 세남매를 맡기고 두시간 데이트를 했는데 두시간 동안 막내딸은 울면서 창가에 서서 엄마를 기다리고 내가 집으로 급히 달려가 막내딸을 안고 2층으로 올라간 사이 시어머니는 도망치듯 외삼촌 댁으로 돌아가셨다.

결혼 후 한번도 남편에게 불만을 말하지 않고 한번도 시어머니에 대한 나쁜 소리는 안하려고 노력했었는데 2016년 그 사건 이후 이제 남편도 시어머니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특히 한국인 장모님과 다른지를 공감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거침없이 시어머니에 대한 나의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30년도 넘은 나와 외할머니의 추억처럼 세남매에게도 할머니와의 값진 추억을 선물하고 싶은 나의 욕심은 이제 그냥 포기하고 내가 더 사랑하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야 겠다고 다짐한다.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이 맺어준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잊지말아야겠다.

캐나다 BC 자연이 주는 과제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BC가 빛이 나기 시작하는 순간이 아마도 5월부터인거 같다.

겨울동안 충분히 내린 비 덕분에 숲은 울창하고 강물의 물은 범람직전까지 물이 차오르니 랭리 엘더그로브에 사는 내가 진짜 BC의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은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주는 또다른 선물인듯하다.

5월 빅토리아 데이 연휴를 시작으로 캐네디언들의 캠핑시즌이 계속 이어지는데 도시생활만 했던 나에게 캠핑은 여전히 도전이고 가장 큰 숙제이다.

캐나다 정착 4년차가 되고 아이들이 컸으니 서서히 캐네디언의 캠핑문화에 입문을 해야할 때가 다가오는데 BC의 대자연에 나를 맡기기에는 내가 너무 속세에 찌들어 있나보다.

자동차로 달리는 순간 펼쳐지는 풍경은 너무 아름답지만 멀미가 날거같은 메스꺼움이 두려운 느낌을 막내딸이 똑같이 느끼고 집으로 오는 길에 결국 멀미를 했다.

얼마나 우리가 곱게 도시생활에 만족하며 살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고 반성하며 자주 자연속으로 아이들과 경험을 해야한다는 일종의 신호같았다.

사람과의 소통에만 집중했던 지난 4년간의 캐나다 이방인 생활에서 이제 사람이 자연과의 소통을 시작할 때라는 의미에서 이번 연휴기간 동안 Manning Park Resort 2박 3일의 가족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아이패드와 유튜브의 노예가 아닌 자연에서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도시 엄마였던 내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2018년 나의 새로운 미션은 대범한 캠핑맘 되어보기.

캐나다 BC 자연이 주는 놀라운 교훈을 직접 경험해보기로 했다.

 

캐나다 공립교육의 시작 – 유치원 입학

2009년 & 2011년 & 2013년 두살 터울의 세남매를 키우다보니 캐나다 교육의 짠밥이 쌓이기 시작해서 이제 막내딸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처음 캐나다에 이주 하고 다음 해 2014년 9월 큰아들이 캐나다 유치원 입학했을 때는 무조건 남편이 모든 학교 일을 관리해야 했던 바보 한국인 엄마였는데 둘째 아들부터는 엄마 이름으로 모든 학교 관련 업무를 혼자서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나름의 노하우도 쌓이기 시작했다.

랭리에서 엘더그로브로 이사하면서 큰아들이 유치원 졸업하고 학교를 옮기는 상황이라 나머지 두 아이들은 처음부터 같은 학교에서 유치원부터 시작하니 학교 생활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학교 선생님과 학부모들을 많이 알게 되어서 막내딸의 경우 세배는 학교 생활 적응이 빠를것 같다.

캐나다 유치원 입학은 9월이지만 5월에 미리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학부모들이 모두 모여 교장 선생님의 간단한 새학기 계획을 듣는 시간을 가진다.

한시간동안 유치원 입학 할 아이들은 실제 유치원 교실에서 선생님들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임시로 지정된 반이라 큰 의미는 없지만 엄마도 아이도 매우 긴장하고 한시간을 보냈다.

캐나다 유치원은 공립 초등학교 내에 있기때문에 정식으로 공립교육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유치원 입학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큰아들은 유치원을 입학하고 3개월 유치원 생활을 하고 왔는데 따로 원복이나 가방, 기타 비용이 많이 부담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캐나다의 유치원은 오히려 오리엔테이션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가방과 학습 도구들을 선물한다.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장선생님과 대표 유치원 선생님이 강조하는 점은 개개인의 학습 능력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기다리고, 감정표현을 잘 할 수 있도록하는 인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캐나다 유치원은 처음부터 사람 하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의 시작이 다르다.

실제로 둘째 아들은 캐나다 유치원 입학 할 당시 일부러 알파벳을 가르치지 않고 오직 본인의 이름만 쓸 수 있는 상태에서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알파벳부터 배우고 이제 초2 학습에 전혀 문제 없이 따라가고 있으니 한국처럼 사교육이나 선행학습 없는 캐나다 초등학교를 신뢰하게 되었다.

막내딸이 유치원에 입학하면 엄마도 똑같이 유치원 학생이 되어 캐나다 유치원 교육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하면 이번 9월 학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