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나이가 마흔을 넘으면 가슴 뛰는 일보다는 마음 조리며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 더 많아진다.

한국에서 80년대 공교육을 받으면서 선생님에게 착한 학생이 최고라고 생각하다가 중학교부터 선생님이 하지말라고 하는 짓들만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반항의 정점을 찍으며 폭력 담임 교사와 의리의 반장이라는 내 인생 최고의 학원 폭력 드라마를 직접 경험하고 정신차리고 공부를 시작해서 대학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조리가 내 심장을 나대게 했다.

대학교 2학년 휴학하고, 머리를 짧게 숏커트 하고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열정의 나라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방문하고 그때 처음으로 탱고라는 음악과 춤에 빠져들었다.

1997년 이후, 스페인에서 느꼈던 가슴 뛰는 열정을 2018년 줌바를 만나면서 다시 잠자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일주일에 두번 줌바 수업을 들어보면, 한시간동안 쉼없이 움직이는 운동에서 내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1997년 스페인에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과 흡사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장에서 이십대 젊은 한국 배낭여행객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걷던 그날 밤!

지금처럼 인스타그램 이나 페이스북이 없던 시절이라 그때의 추억이 남아있는 사진한장 없지만, 그날밤 이름모를 한국 젊은이들과 다함께 애국가를 부르던 가슴뛰는 순간의 감격을 줌바 수업을 하면서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줌바 강사 수업이 미국과 캐나다 전 지역에서 자주 있는데 다음달 동네 근처에서 오전 11시부터 저녁 8시반까지 토요일 하루 투자해야해서 정말 망설이다가 내 심장을 따르기로 했다.

줌바로 마흔 넘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미스터 션샤인 – 지금의 대한민국에게 남긴 미션

유명 작가와 유명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그저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한 이 드라마는 그 어떤 역사 드라마나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고 끝이 났다.

특히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대한민국을 제3자의 입장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지금의 내 정체성을 다시한번 강하게 확인시켜주는 울림이 있는 이 드라마를 떠나 보내기 힘든 마음으로 마지막회를 시청했다.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역사책 속 이야기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HISTORY가 이렇게 위대한 대한민국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다시한번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반일감정이라는 작은 불씨는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역사를 더 알게 되면서 강해지는 애국심에 횟불이 되는 것처럼 점점 더 커져가는 마흔 넘은 한국 아줌마에게 [미스터 션샤인] 은 드라마가 아닌 하나의 역사 교과서같이 느껴진다.

K-POP이 전세계에 울려퍼지는 요즘 [미스터 션샤인] 도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늦었지만일본의 잔혹함을 지금이라도 알렸으면 좋겠다.

아무개라고 불리는 의병들이 지켜낸 대한민국과 태극기의 의미를 가슴깊이 새겨준 아름다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남긴 미션은 항상 매일이 두렵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이기를 바란다.

 

 

캐나다 데이

매년 7월 1일은 캐나다 데이라서 동네마다 퍼레이드와 다양한 행사로 캐나다에서 사는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2013년 7월에 캐나다로 이주를 한 우리 가족도 다음해부터 캐나다 데이 행사에 참여했는데 2014년 7월은 얼마나 뜨거웠는지 날씨도 뜨겁고 처음 참여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City Girl 이었던 한국인 엄마의 캐나다 데이를 맞이하는 의지는 더 뜨거웠다.

2015년 8월 엘더그로브에 정착한 후 부터는 조용한 시골동네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북적거리는 도시 행사 대신 Old style의 시골동네 퍼레이드와 스포츠 데이에 참여하는 것으로 캐나다 데이를 보내고 있다.

올해가 건국 151주년인데 가장 화려한 캐나다 데이 벤쿠버 퍼레이드는 재정악화로 취소가 될 정도로 캐나다 경제는 매우 불안정한 요즘!

오히려 다운타운 벤쿠버와 정반대로 캐나다의 작은 소규모 도시들은 캐나다 데이 퍼레이드가 점점 확장되고 발전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캐나다로 유학 또는 이민을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종 인프라가 몰려있는 벤쿠버에 집중되다 보니 관련 사업들이 활성화 되는 장점과 더불어 저절로 렌트비 상승은 물론 과밀화 현상이 속출해서 도시의 답답함을 벗어나려고 좀 떨어진 지역까지 찾아오다보니 현재 칠리왁 지역까지 한국인의 숫자가 매우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엘더그로브에서 2009년부터 정착해서 살기시작한 동네친구 스테파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하우스의 구매비용은 한화로 3억이 안되었다고 하는데 2018년 현재 스테파니의 집값이 7억 이상 정도라고 보면 우리가 너무 늦게 캐나다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약 10년이라는 세월을 그나마 한국에서 보내고 두 아들을 한국에서 출산하여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두 아들의 History를 만들어 준것에 대해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일이라고 한국인 엄마는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캐나다는 모자이크 문화라고 부르면서 이민자들의 문화가 그대로 함께 섞여서 또 하나의 캐나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강조하다보니 다문화가 오히려 당연한 또는 자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의 또다른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는 뉴펀들랜드+한국 반반 가족의 독특함이 세남매에게는 항상 고마운 그들의 역사가 되기를 한국인 엄마는 바란다.

캐나다 공동육아의 방식

한국에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두 아들 키울 때는 친정부모님의 도움, 어린이집의 도움으로 너무 쉽게 키웠었는데 캐나다에서 처음 독박육아를 시작하면서 막내딸을 임신하고 있었고 캐네디언 남편도 BC 출신이 아니라서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부부의 생활은 이민 초기 3개월은 매일 울고 싸우고 버티는 3중고의 시절이 있었다.

타향살이의 가장 큰 어려움은 부부와 세남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정착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인 이민자들과 똑같은 시작점이었지만, 아무리 영어를 하는 캐네디언이라도 가족의 울타리가 없는 타지역 사람이라는 점은 마이너리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의 기준은 간단하게 BC 출신으로 가족들이 거주하는 환경을 가진 남편은 메이저리그, 동부출신으로 비빌 언덕이 없는 남편을 마이너리그라고 나누기 시작했다.

캐나다 동부 끝 뉴펀들랜드 섬 출신 마이너리그인 남편을 따라 동부로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던 이민초기.

동부 뉴펀들랜드 시댁 식구들이 서부로 우리 가족을 만나러 오면 얼마나 아이들이 좋아했는지 외롭고 힘들기만한 타향살이 마이너리그를 벗어나고 싶어 동부 고향으로 가자고 늘 방법을 찾던 우리에게 아주 단호하게 동부 시댁 사람들은 척박하고 경제상황이 좋지 않으니 뉴펀들랜드 고향으로 절대 오면 안된다고 말렸다.

그렇게 고향에 대한 마음을 접고 정착한 시골마을 엘더그로브에서 2016년 처음으로 공동육아라는 캐나다식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엘더그로브 시골마을에서 공식적으로 아이들과 엄마들의 친구관계가 형성되는 곳은 스트롱스타트, 패밀리플레이스, 리틀페더스 같은 무료프로그램이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그리고 유치원 입학전까지 그들의 공동육아를 통한 인적 네트워크가 시골마을에서 나와 같은 마이너리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한국식의 양육방법을 캐나다식 양육방법으로  바꾸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지난 3년동안 캐네디언 엄마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는지 외국인의 눈으로 늘 지켜보고 물어보고 직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특히 스트롱스타트에서 매일 만나는 선생님에게 직접적으로 내 상황을 오픈하고 가장 솔직하게 나의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작은 시골동네이기 때문에 육아에 필요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도 바로 동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무료유아교육 프로그램이었다.

2013년생 막내딸은 2016년부터 엘더그로브 정착하고 곧바로 스트롱스타트, 패밀리플레이스, 리틀페더스 3곳을 동시에 참여해서 세남매 중 가장 성공적으로 독박육아를 공동육아로 바꾼 최대수혜자이다.

덕분에 매주 플레이데이트를 하고 매일 많은 동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 된 전형적인 캐네디언의 문화를 즐기는 가족 중 유일한 메이저리그가 되었다.

한국 옛말에 개천에서 용난다더니 이방인 마이너리그 엄마 아빠 사이에서 메이저리그 막내딸이 나온건 2013년 이후 4년 이민생활 중 가장 큰 성공이다.

외롭고 힘든 타향살이에서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동네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내 자식 또래의 친구들에게 먼저 잘해주면 저절로 동네 아줌마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떠나 같이 독박육아를 하는 같은 엄마라는 공통적인 주제로 내 진심을 알아주는 동네 친구 하나만 있어도 보수적이고 무료한 캐나다 삶에서 나를 지켜줄 든든한 동아줄이 생길 수 있다.

 

 

캐나다에서 중고차의 의미

주말이면 무조건 오전 야외 활동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세남매 데리고 달려가는 중간에 둘째 아들이 오바이트를 해서 모든 일정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계획과 달리 집에서 있다보니 남편은 자동차를 청소하고 엄마는 앞마당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마당에 핀 잡초를 뽑다가 잡초도 이렇게 이쁜 꽃이 피는구나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둘째 아들은 오바이트를 하고 나서 기운을 차렸는지 막내딸과 함께 아빠가 청소하는 벤에서 놀기 시작했다.

2013년 한국을 떠날때 일년도 안된 새차를 팔고 왔지만 그때는 그 차가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없었는데, 2013년에 중고로 구매한 벤은 우리 가족과 함께 캐나다에서 같이 동고동락한 사이라 그런지 늙고 병들었지만 버리고 싶지 않아서 월요일 최종적으로 진단을 받기위해 정비소 예약을 한 상태이다.

뼈대를 드러낸 늙은 벤의 내부는 생각보다 편안해서 세남매가 나란히 누워보고 캠핑용 벤으로 가능하다면 끝까지 함께 가보자고 의견을 모아본다.

얼마전에 새로 벤을 사려고 남편이 나갔다가 아주 잘빠진 새 벤을 하루 데리고 온적이 있었는데 남편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새차를 사지 말고 중고를 사는것이 경제적이라는 말에 다시 구매취소를 한 적이 있었다.

캐네디언들이 얼마나 검소하고 차 하나를 바꾸는데도 신중하게 행동하는지 한국 아줌마가 보기엔 너무 신선한 문화충격이었다.

아무리 돈이 있는 사람들도 최신 신형차량을 구매하는 순간 그 차량의 인생은 중고차가 되어 하락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잘 정비된 중고차량을 구매하는 편이 가성비가 좋다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2008년형 벤을 2013년에 만불 주고 구매해서 2018년까지 타고 있으니 5년동안 잘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인데 겨우 10년 된 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남편의 책임이 크다.

세남매와 차없이도 잘 사는 시골 아줌마 입장에서는 출퇴근을 위한 남편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지만, 새차와 중고차에 대한 캐네디언의 생각은 또다른 인생공부를 하는 기회가 되었다.

새차를 사고 도난이 걱정되어 CCTV를 설치해야지 걱정하면서 보낸 하룻밤 보다는 오래된 벤을 다시한번 재정비하는 결정을 내린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따라가보자.